한글 논문 - 한글 무늬를 가진 외국글
녹차를 깊고 구수한 맛이 내도록 우려내는 것은 참 어려운 일이다. 따르는 물의 종류, 양과 온도, 우려내는시간, 차잎의 종류에 따라서도 천차만별의 맛이 나기 때문에 같은 차잎, 같은 다구, 같은 물을 준다고 하더라도 사람에 따라 맛이 다를 수 밖에 없다.
우습지만, 글쓰기도 녹차 우려내기와 비슷하다. 우리가 알고 있는 보통의 말은 누구나 거리낌없이 쓰지만, 그 말을 글로 쓰는 것은 말을 하는 것과 비교할 바가 아니다.
그러나, 말을 그냥 글로 옮기는 거라면, 뭐하러 그렇게 하나. 말로 해서 다른 사람들이 알아들으면 된다.
철수야, 저녁 먹고 나이트 콜?
글은 말과 같은 의사전달의 영역에 있지만, 말과는 다른 가치를 가지고 있는 것이 분명하다.
패배감에 젖어 있기 싫었다. 더구나 오늘은 불타는 금요일. 철수에게 답답한 심사를 숨긴 채 무도장에 가자는 말을 건넸다.
그러나, 둘 사이에도 변하지 않는 원칙이 있어야 하는데, 그것은 상대방이 알아먹기 쉬워야 한다는 것이다.
여기서부터 나의 고민은 시작되었다.
사람들은 의사들이 쓰는 말이 너무 어려워 환자들이 알아듣기 힘들다고 말한다.
환자 vital sign 체크하고, 환자 adominal enhance CT에서 pancreas head 주변에 infiltration 있는지 없는지 살펴봐. renal cyst 6CM 짜리는 원래 있던 거고, 별거 아니니까.
환자 상태도 그렇지만, 쓰는 단어들이 뭔지 모르는 의학 용어에 영어투성이니 어쩔 수가 없다.
내 상황과 비유하자면, 생소한 '사회과학' 대학 교과서를 펼쳐 한쪽을 읽은 후 당하는 멘붕과 비슷하다. 덕분에 의학 용어를 한글로 바꾸자는 움직임도 있었지만, 요즘은 좀 잠잠한 것 같다.
의학용어는 영어를 한글로 바꾸는게 더 어렵다. 대부분의 한글 용어가 한자말에서 오다보니 직관적으로 머릿속에 닿지도 않고, 순우리말로 바꿔쓰자니 대체할 말이 별로 없어 한자와 짬뽕을 만들어야 되고, 사람들이 들어본적이 없어 추측을 해서 맞춰야 하고, 영어나 한자어보다 훨씬 길다.(영어는 길면, 줄임말로 만들어져 공식적으로 쓰인다)
영문: flexor carpi ulnaris tenosynovitis 한글: 자쪽손목굽힘힘줄윤활막염,
척수지굴근활막염
왠만한 의학 용어를 아는 나로선 의학 서적과 논문을 읽는 것이 쉬워야한다. 그런데, 그렇지 않다. 그것도 한글로 된 의학 논문, 책(이하, '논문')이 더 어렵다. 논문을 자세히 읽어본 의사들은 차라리 번역본보다 영어 원본을 읽으라고 말한다. 번역이 개판이어서 더 이해하기 어렵다는 게 이유다.
국내에는 의학 번역을 할 수 있는 번역전문가가 없다. 그래서, 대부분 번역에 참여하는 사람들은 대학교수이거나, 보통은 이하 전공의들이다.
번역이 개판이다 라고 생각하고 살았지만, 어떤 이유로 개판인 것인지 고민해보지는 않고 살았다. 그러던 중 몇몇책에서 해답을 찾을 수 있었다.
문제는 단어가 아니라 문장의 구조와 구조를 이루는 성분들이었다.
우리 말에 남아 있는 일제의 잔재를 없애자는 문화가 90년대 말에 확산되면서, 적어도 '이말은 일본말일 것 같고 조심해야한다'라는 생각을 가진 사람들이 많아졌지만, '수동태'가 우리 글이 아니라는 것에 관심을 가지는 사람은 없다.
우리나라 사람들이 국어에 대해 받아온 훈련은 발표하기와 띄어쓰기, 독후감, 이력서, 자기소개서쓰기 정도... 체계적으로 글쓰기 훈련을 받아본 적이 없다. 오히려 쓰기훈련은 영어로 더 많이 하지 않을라나...
교육을 받지 않으니 안그래도 외국어가 섞인 우리말에 문장 구조까지 영어, 일본어의 구조가 잡탕으로 섞여버려서, 뇌는 '한글 무늬를 가진 외국글'을 '한국어'로 해석을 해야된다. 헷갈릴 수 밖에 없고, 우리는 이것을 '번역이 이상하다'는 자연스러운 결론을 낼 수 밖에 없다.
더구나 이런 외국글이 논문, 책으로 출판이 되니, 오히려 후학들은 이것이 지식인들 만이 쓸 수 있는 문체라고 생각하여, 인용하고 따라쓰게 된다.
학회의 논문 원칙이라 하여 영어는 되도록 한국어로 쓰도록 권고하지만, Hb를 헤모글로빈으로 쓴다해서 한글의 의미가 높아지고, 구독자가 훨씬 더 쉽게 논문을 이해할 수 있는 것은 아니다.
물론 지금 논문의 모양을 괜찮다고 옹호할 분도 많을 것 같다. 그렇지만, 논문 글쓰기의 트렌드는 논문이 쓰이던 초창기와 지금이 다르고, 앞으로 또한 달라질 것이다. 이 트렌드에 정답이 있는 것은 아니다. 하지만, 우리 글의 원칙은 논문에서도 지켜야한다.
과학적이며, 단순하게, 그리고, 한국인이 쉽게 이해할 수 있는 글쓰기.
물론... 저는 이제 손가락을 헤릴만큼의 적은 논문을 적은 풋내기 자연과학자입니다.
조금씩 공부해가며 얻는 것들을 공유하려 합니다.